우리 민족이 겪은 지난 과거를 잊었는가
지난 백여 년간 우리 민족이 숱한 고난을 겪고 고조부 이래의 우리 조상들이 혹독한 수난을 겪은 것은 유사시에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유사시를 빌미로 일본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우리 민족과 우리 집안들의 불행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875년 일본군이 강화도에서 군사 도발을 일으킨 결과로(운요호 사건·운양호 사건), 이듬해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 시장이 일본에 개방됐다. 이로 인해 조선 상권이 흔들리고 서민경제가 악화되는 속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한성부(한양은 별칭) 주민들이 하급 군인들과 함께 일으킨 민중항쟁이 임오군란이다. 표면적으로는 군인 봉급의 부실 지급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됐지만, 본질적으로는 시장개방과 경제 악화를 둘러싼 대중적 불만이 원인이 됐던 사건이다. 이로 인해 고종 정권은 1개월 동안 '식물 정부'가 됐고, 그 기간에 주도권을 잡은 쪽은 임오군란 주역들의 지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었다.
임오군란은 일본 기업의 대(對)조선 수출은 물론이고 일본 정부의 대조선 영향력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런 사건이 돌발하자, 일본은 자국민과 자국 공관 보호를 명분으로 출병을 감행했다. 조선 민중의 분노로 인해 일본공사관이 공격을 당한 것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내각 긴급회의를 열어 '거류민 보호를 위해 긴급히 군함을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파견된 병력은 육군 1개 대대, 해군 군함 4척 및 수송선 2~3척이다. 일본 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이 병력 중에서 2개 중대를 차출해 한성부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때는 일본군이 힘을 쓰지 못했다. 함께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청나라군이 조선 조정을 먼저 장악하고 내정간섭을 실시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로부터 12년간 조선은 청나라의 직접적 내정간섭에 시달렸다.
종전의 조선·청나라 사대관계는 조선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진 데 반해, 1882년부터 12년간의 조청관계는 조선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내정간섭 형태로 이루어졌다. 유사시 외국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지 못한 결과였다. 일본군이 선수를 쳤다면 이때부터 일본의 지배가 시작됐겠지만, 청나라가 기선을 제압하는 바람에 일본의 지배는 실현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본유학자금받아서 공부했으니 자식들에게 얼마나 일본 우상화를했겠냐? 그래서 후쿠시마 방사능오염수 버려도 괜찮다고했지 우리나라가 북한침략받으면 일본군이 들어와도 괜찮다고하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건데.... 윤씨 가족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후 이익을 얻었나 보네요. 우리완 역사가 다른가보네요..}
{일본은 한반도 침탈과 진출이 정치1목표인데 임진왜란,일제강점기 이후 윤석열이 일본군을 한반도에 들이는 매국노가 될수도...투표 잘하자..일본 자위대 한마리도 이땅에 발 딪지 못하게 해야한다}
{진중권도 아내가 일본이이였던가 친일파들의 손에 나라가 흔들리네 백년도 못가서 또 식민지로 전락되는거 아니냐}
하지만 12년 뒤인 1894년에는 달랐다. 조선에서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번에도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병을 감행했고, 이때는 청나라보다 선수를 치고 조선에서 청일전쟁까지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일본군이 개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동학군과 정부군은 외국군을 돌려보내고자 서둘러 사태 수습에 나섰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정부군에 되돌려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이 가져올 후과(後果)에 대해 동학군과 정부군 모두 공포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군함 7척과 육군 7천 명이었다. 반면, 청나라군은 3천이었다. 12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일본이 적지 않은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던 것이다.
고종은 외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청나라군도 외국군 철수를 주장했다. 자신들도 외국군이면서 그런 주장을 했다. 유사시를 빌미로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 역시 공동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절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거의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한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대조선 영향력을 일본은 상실하지 않고 끝끝내 지켰다. 고종의 대일본 견제로 인해 1896~1898년에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유지됐지만 이 기간에도 일본은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기반이 된 것이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다.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지 못한 것이 이런 재앙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유사시에 청나라군이 들어온 것 역시 불행이었다. 그것은 조선이 12년간 내정간섭을 받아 국제적으로 식물국가처럼 보이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유사시에 일본군이 들어온 것은 훨씬 더 큰 재앙이 됐다. 지난 백년간 한민족이 당한 수난, 우리 조상들이 겪은 고난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윤 후보는 2월 3일 TV토론 당시 사회자 '취임 뒤 정상회담 순서'를 묻자, 한미정상회담에 이어 한일정상회담을 열고 한중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은 그 이후에 열겠다며 상대적으로 일본 중시 태도를 보였다. 여타 후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일본군이 유사시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군이 유사시 한반도에 들어온 뒤에 벌어진 지난 백 년간의 민족적 수난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다. 윤석열 후보가 집권하면 'Again 1882', 'Again 1894'가 일어나지 않을까 소름이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