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당한 오키나와, 그들은 왜 일본 복귀를 원했나?[같은 일본, 다른 일본] (naver.com)
지금 오키나와라고 부르는 지역의 여러 섬들이 힘을 합쳐 13세기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15세기에는 류큐(琉球) 왕국이 세워졌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한반도 등 동아시아 강대 세력들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독자적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류큐 왕국은 1879년 일본에 합병되기까지 450여 년 동안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가진 독립적 국체를 유지했다.
문화적으로도 일본 본토보다는 중국 대륙이나 동남아시아 문화권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의 향토 요리는 돼지고기 등 육류를 푸짐하게 볶거나 뭉근히 끓이는 조리법이 많다. 해산물을 사용하는 담백한 일식보다는 중식이나 동남아시아 요리에 더 가까운 것이다. 또 흥겨운 리듬이 특징적인 음악이나 전통무용 등도 일본의 절제된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와는 분명히 다른 루트를 걸어왔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얻었지만,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은 고유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일본식 생활 습관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이른바 ‘동화 정책(同和政策)’의 대상이었다. 도쿄나 오사카 등에 “오키나와 사람과 조선 사람은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식당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피지배민족으로서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이 받은 차별과 멸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제시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주권을 포기한 그들의 선택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키나와는 왜 다시 일본에 귀속되기를 원했을까?
당시 오키나와에는 미국의 지배하에 남거나, 일본으로 복귀하거나, 혹은 독립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면, 대량의 핵무기와 대규모의 군사 기지가 상주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오로지 동아시아 지역 최전선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벌이기 위한 전략 기지로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평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독립을 위해 싸우자는 세력도 있었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꾸리는 것도 역부족인 상황에서 독립 투쟁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더 이상의 전쟁과 폭력은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키나와는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 본토에 복귀할 것을 선택했다. 적어도 일본에는 무력을 포기하고 전쟁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 ‘평화헌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패전국에 귀속되면 더 이상 전쟁 폭력에 시달릴 일은 없으리라는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슬로건은 ‘핵무기 없이, 본토와 동등하게’였다. 지역에 이미 배치된 대량의 핵무기를 반출할 것, 일본인과 똑같은 평등한 대우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 이 두 가지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조기 복귀를 위해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비정한 국제 정치판에서 평화라는 추상적 가치를 굳게 믿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평화나 인권 등 이상주의적인 명분을 헌신짝처럼 던진다면, 과연 정치가 사회에 뿌리내릴 이유가 있겠는가? 오키나와의 불행한 현대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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