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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이름의 변천으로 살펴 본 중국의 꿈

| 格局/挑战2019
ZyenYa 2019. 10. 12. 05:16
나라 이름의 변천으로 살펴 본 중국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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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이 지난 1일 건국 70돌을 맞았다.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역대 국가 중 이름이 가장 긴 일곱 글자다. 과거 왕조 명칭은 모두 한 글자였다. 진(秦)과 한(漢)·당(唐)·송(宋)·명(明) 등이 그랬다. 역대 중국 왕조는 왜 단음절 이름을 썼을까. 그 이름엔 어떤 의미가 담겼나.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왜 그냥 중국이 아닌 ‘신(新)중국’으로 불리는 걸까.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국호에 담긴 의미를 풀이해 본다.

중국 역대 왕조가 외자 이름을 쓴 건 고대 작명 원칙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가장 위대한 건 하나이고, 그 지배를 받는 게 둘과 그 다음”이기 때문이란 거다. 문명인인 중국인 이름은 한 글자, 그렇지 못한 이민족은 두 음절 이상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훗날 같은 이름이 많아지며 두 글자 이름의 중국인이 늘어났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분개했다. 그는 “두 글자 이름은 오랑캐와 같아 수치”라며 한 글자만으로 이름을 지으란 명령을 내렸다. 중국은 인접 국가가 단음절 국명을 쓰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중국 자신의 힘이 약할 경우였다. 송(宋)나라가 그랬다. 힘이 달렸던 송은 거란의 ‘요(遼)’와 여진의 ‘금(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 몇 가지 유래가 거론된다. 건국자가 다스리던 지역의 이름이나 건국자의 작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좋은 뜻을 취해 국명을 짓기도 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秦)은 곡물과 관계가 있다는 게 후아샹(胡阿祥) 난징(南京)대학 역사학원 교수의 주장이다. 3000년 전부터 ‘진’은 일종의 곡물로 주로 가축을 먹이는 데 쓰였다고 한다. 진인(秦人)의 선조인 비자(非子)가 ‘진’을 심어 말을 키웠으며, 이 공로를 주(周)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영(嬴)’씨 성과 함께 작은 토지를 하사받았다. 훗날 후손이 대륙을 통일하고선 국명을 ‘진’이라 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강한성당(强漢盛唐)이란 말을 낳은 한(漢)과 당(唐)은 모두 건국자의 작위가 국가의 이름으로 변한 경우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 의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는데 이후 항우를 격파한 뒤 나라 이름을 한이라 했다. 한에는 지리적인 이유도 담겼다. 항우가 유방을 한왕으로 봉한 건 지리적으로 볼 때 유방이 다스리던 왕국의 수도가 남정(南鄭)에 있었는데 이곳이 과거 진나라 시절 한중(漢中)군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도 할아버지 이호(李虎)가 받은 작위인 당국공(唐國公)의 칭호를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정했다.

건국자 작위를 딴 수·한·당

당나라에 앞선 국가인 수(隋)의 이름도 출발은 선대가 받은 작위였다.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아버지인 양충(楊忠)이 수국공(隨國公)으로 봉해졌고 양견이 작위를 계승했다. 한데 정작 건국을 할 땐 ‘수(隨)’에서 ‘착(辶)’을 빼고 ‘수(隋)’로 나라 이름을 정했다. 양견이 볼 때 앞선 왕조들은 너무 단명했다. 동위(東魏)는 16년, 서위(西魏)는 22년, 북제(北齊)는 27년, 북주(北周)는 24년에 그쳤다. 양견은 ‘따르다’는 뜻의 ‘수(隨)’가 이전 왕조의 단명을 따를까 우려해 ‘간다’는 뜻의 부수인 ‘착(辶)’을 뺐다.

송(宋)은 건국자가 통치하던 곳의 이름을 땄다. 조광윤(趙匡胤)이 절도사로 주둔해 왕조 창업의 기틀을 닦았던 송주(宋州)에서 딴 국명이다. 이 같은 관행은 원(元)대에 깨진다. 몽골족은 중국 지명이나 작위를 따를 필요가 없었다. 쿠빌라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 구절에서 원(元)을 취했다고 한다. ‘우두머리’나 ‘크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후 중국은 좋은 뜻의 국호를 사용한다. 명(明)도 그런 경우인데 종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건국자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白蓮敎)를 믿었는데 백련교는 ‘흑암(黑暗)’은 물러가고 광명(光明)이 온다”고 주장했다. 국호로 ‘밝을’ 명(明)을 쓰게 된 연유다.

음양오행설 따라 명을 억누른 청의 국호

만주족이 세운 청(淸)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기초했다는 말을 듣는다. 전통적인 오행상극(五行相克) 이론에 따르면 명(明)에는 불(火)의 뜻이 담겼고 명 황제의 성은 주(朱)로 적색(赤色)이며 적색은 곧 불이다. 불을 누르기 위해선 물(水)이 필요하다.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한 이유다. 청(淸)과 만주(滿洲) 세 글자 모두엔 물이 넘친다. 청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가 여진(女眞)을 만주로, 금(金)을 청(淸)으로 한 까닭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 역대 왕조는 모두 외자 이름을 썼다. 그러나 청이 무너진 뒤 왕조를 대신할 국호가 필요했다. 혁명가 장타이옌(章太炎)이 국명을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중화는 주변의 이민족과 다르게 고도의 문명을 지녔다는 의미를 담는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했던 쑨원(孫文)이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장타이옌의 주장을 수용해 ‘중화민국’ 국호가 나왔다. 이로써 전통적인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한 개념인 ‘중화’가 중국의 공식 국호에 사용되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국공내전에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물리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 국호가 탄생하기까지는 몇 차례의 논쟁과 수정을 거쳐야 했다. 마오는 1940년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중화민주공화국’을 제기했다. 48년엔 ‘중화인민민주공화국’으로 불렀다. 한데 건국 직전인 49년 7월 한 회의에서 국명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 결과 ‘중화인민민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두 의견이 떠올랐다. 토론 끝에 민주와 공화 두 단어를 함께 넣을 필요는 없고 ‘공화’ 하나만 넣자는 의견이 우세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결정됐다. 중국은 이를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로 선전한다.

‘신중국’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

한데 중국에선 현재의 국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이지만, 줄여서 말할 때는 ‘신중국’이라 부른다. 이 말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1943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의 명운(中國之命運)』이란 소책자를 냈는데 여기에 "국민당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는 말이 나온다. 공산당은 발끈했다. 곧바로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게 해방일보 사설 제목으로 등장했다. 그해 가을 공산당의 19세 작곡가 차오훠싱(曺火星)이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就沒有中國)’란 노래를 지었다. 어린이들 사이에 큰 인기였다.

1950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마오의 딸 리너(李訥)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마오가 이의를 제기했다. 중국 공산당은 21년 창당됐지만 중국은 수천 년 전부터 있었는데 어떻게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이 없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마오는 가사에 수정을 가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며 ‘신(新)’자 하나를 추가했다. 이걸 마오의 비서 톈자잉(田家英)이 외부에 알리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줄여선 ‘신중국’으로 일컫게 됐다.

중국은 중심을 뜻한다. 중(中)자는 가운데에 깃발을 꽂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씨족사회 시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중앙에 깃발을 꽂았기 때문이다. 중국이란 국호엔 이처럼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중국인의 염원이 담겼다. 처음엔 대륙의 중심, 이어 아시아의 중심,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장하는 ‘중국몽(中國夢)’은 바로 세계의 중심이 되려는 중국의 꿈이다.